막 10:46-52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저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我要能看見).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마 20:29-34, 눅 18:35-43)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다. 그는 자라서 자신의 생계를 위해 거지가 되어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자가 되었다. 그가 그날도 그 자리에 앉아 구걸하고 있을 때에 주님이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였다. 바디메오는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지른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이렇게 소리 지를 수 있었던 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구세주이시며 모든 병든 자의 병을 고치시는 메시아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눈이 보이지 않던 그에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게 되고 그는 소리쳐 주님을 부르고 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자신이 불쌍한 존재임을 표현하고 있다. 맹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거리에 앉아 구걸하는 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정상인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방법으로 배척당하며 살아왔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그는 절박했다. 그런 그에게 주님에 대한 소문은 희망으로 다가왔고 주님을 만나는 날들을 고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주님이 여리고을 나가신다는 무리의 소리를 듣고 그는 소리 지른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이렇게 간절히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소리 지를 수 있었던 것은 그는 그 소문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이 기다려온 메시아 그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한 신앙에서 나온 신앙고백이다. 마음에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주위의 상황이 어떻든 주님을 간절히 부르며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꾸짖는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크게 소리질러 주님을 부른다. 주위의 어떤 환경에서든 상관하지 않고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주님을 부르고 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의 간절함이 그의 절박함이 배어 있다.
그의 절박함은 오늘의 우리의 절박함과 같다. 우리는 우리 모두의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그 무게가 작든 크든 닥치는 각각의 개인의 무게는 자신이 짊어지기에는 무거울 수 밖에 없다. 그 간절함이 주님을 부르게 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근데 그것이 가장 행복한 자들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미흡함을 알아가고 그러다 겸손해지면서 자기 스스로 풀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그의 절박한 부르짖음에 주님은 멈추어서서 '그를 부르라' 명하신다. 이 한마디는 모든 문제를 푸는 해결점이 된다. 주님이 너를 부르신다. 자신의 무게를 주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들이다. 주님이 바디매오의 문제점을 듣겠다는 뜻이다. 그가 무엇을 구하는지 그가 주님을 간절히 부른 이유를 들을 수 있고 그 문제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바디매오는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것은 주님이 구약에 예언하신 그분이심을 이미 믿고 고백한 것이다. 그 신앙고백이 주님의 발을 멈추게 하였고 도와달라는 울부짖음에 주님은 응답하신 것이다. '그를 부르라' 그가 간절히 부르는 중에 그는 여전히 앉아서 주님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주위의 사람들이 말한다. 그러면 이때 주님이 부르심에 바디매오의 행위를 보면
1. 머물러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기회가 찾아온 바디매오에게 먼저 하여야 할 일은 지금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그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주을 향하여 소리치는 것. 저 여기 있습니다. 저의 힘든 상황을 고려하시어 울부짖는 나를 돌아봐 주십시오. 주의 도움이 간절합니다. 그는 자신을 부르신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먼저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2.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의 부르신다는 소리에 그는 너무나 기뻐 겉옷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난다. 여태까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구걸하는 거지에 불과하게 대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부르신다는 말에 주위의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관심을 갖고 부드럽게 대한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관심을 받은 것이다. 메시야의 긍휼 하심을 입은 것이다. 그의 감정이 고조도에 달한 것을 볼 수 있다. 보이지 않지만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그가 주님을 끊임없이 부르면서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대접받지 못하고 살아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그에게 주님이 부르신 것이다. 주의 사람들이 그에게 일어나라 권하고 있다. 그는 너무나 기뻐 겉옷까지도 팽개치고 뛰어 일어나 주님께 나아간다. 그의 겉옷은 자신을 보호하는 옷이며 한벌밖에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마지막 옷까지도 내 팽개치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주 앞에 나아가고 있다. 주님의 부르심은 모든 것들이 소중한 것에서 그냥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주님의 부르심은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3. 주님께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한다.
주님은 자신에게 다가온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신다. 그가 소경인 것도 알 수 있지만 주님은 그에게 직접 들으시기를 바라신다. 바디매오는 바로 고백한다.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그에게는 보는 것이 가장 절실한 소원이었다.
우리는 모든 사물을 보는 자들이다. 장님의 답답함도 없다.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보는 것들을 만지며 느끼며 즐기며 살아감으로 소경의 아픔도 그들의 간절함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바디매오가 보는 것을 원했던 것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눈이 보이기를 원한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삶이야 말로 가장 값진 것이다. 그것을 소망하기 때문에 기도와 말씀에 열심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또한 바디매오처럼 보기을 원합니다.
4. 이에 주님이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어 주님을 따른다.
그의 소망을 들으신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축복은 현세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내세의 약속까지도 허락하심을 볼 수 있다. 바디매오는 소경에서 벗어나 주의 말씀 한마디에 눈이 뜨였고 영원한 구원까지도 약속 받은 것이다.
곧 보게된 바디매오는 주님을 좇으며 영광의 찬송을 주의 뒤에서 부르고 있다.(눅 1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