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이다. 그는 잡혀가는 주님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직 그 뒤를 좇아가는 것 밖에, 거기다 사람들이 너도 그와 한 파였지 않냐고 물었을 때에 그는 강하게 부인한다. 세 번 그리하고 닭이 울었다. 마태는 26:74에는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강하게 부인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처럼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생각나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누가는 22:61절에 베드로가 세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때에 '주께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유일하게 베드로의 세 번 부인후 주님이 베드로를 보셨다고 표현하고 있다. 베드로는 전에 주님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 장담하였다. 그러나 지금 당하는 현실 앞에 그는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주님을 부인한 것이다. 주님은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를 쳐다보았을 것이다. 베드로는 깊은 수렁텅이에 빠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분명 자신은 다른 사람은 주를 배반하여도 자신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는데, 그는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철저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다.
누가복음을 지은 누가는 의사이며 바울의 동료였다. 누가는 또한 주님을 직접 보지 못한 자였다. 그럼에도 그가 누가복음을 쓴 것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톻한 자료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이 자료를 들려준 사람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주님이 세번 부인한 베드로를 보셨다고 쓰여 있다. 그것은 누군가 그 현장에서 주님의 모습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자의 증언임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자신에 대해 철저히 실망하였을 것이고, 민망하고 괴로워하였다. 나도 별수 없는 그런 인간이었구나 하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주님을 정말 사랑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현실 앞에 비겁하게 도망치는 자신을 바라보며 견딜 수 없었다.
그런 반면에 주님은 베드로를 이해하고 따뜻하고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너의 진심을 알다. 그리고 지금은 그럴 수 밖에 없음을 그러나 너는 다시 일어설 것이고 너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다라고 위로의 눈길을 보내셨으리라 본다. 그 이유와 결과는 주님은 부활 후 베드로를 찾아오셨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답한다. 베드로의 답변이 오늘의 우리의 답변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1. 아 8:6-7"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도장(印記)'은 '인장'을 가리킨다. 구약에서 인장을 반지 형식으로 만들어 손가락에 끼고 다니거나, 돌이나 금속에 새겨 목에 달아 매고 다니거나 혹은 팔목에 묶고 다니기도 했다. 이는 재산의 소유권이나 권세를 나타내는 표시로서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남녀간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 더 깊게는 하나님과 믿음의 사람들이 나눌 수 있는 깊은 사랑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사랑을 위해 못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사랑의 시작은 분명히 처음에는 일방적이다. 주님이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와 눈길을 주고받으셨다. 그 눈길이 너무 따뜻하여 주의 곁에 머물기로 한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를 사랑한다고 부끄러워하며 우리도 답한다. 나도 주님을 사랑해요. 이로서 견고한 사랑의 끈이 맺어졌다. 그러다 서로 자주 만나게 되면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그것이 차고 넘칠 때 결혼이라는 결실로 나타난다. 결혼은 서로를 독점할 수 있고 떨어질 수 없는 사이로 가는 것이다. 어느 것으로도 둘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자기의 소유로 삼았고 거기에 대해 배신이나 죽음이 갈라놓지 않은 한 떨어질 수 없는 견고한 끈으로 엮어지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이이다. 주님은 우리을 향하여 사랑한다고 성경의 곳곳에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이 먼저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 사랑이 없이는 행하실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어 우리에게 부활과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그런 주님을 향하여 우리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여야 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여야 한다.
7절은 아가서 기자가 사랑은 불가항력적인 것임을 강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 주님과 우리의 사랑도 그렇다는 것이다. 어떤 것으로도 주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많은 물도, 홍수도, 온 가산을 주고도, 이 사랑과 바꿀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아가서 기자는 말한다. 10절에 이 사랑이 화평을 얻었다라고 즉 '사랑' 안에 평화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사랑은 화평이다. 평화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한 순간부터 내 안에 평화가 오고 화평이 우리를 감싼다. 주님과 동행될 때에만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 안에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다.
2. 고전 2:9"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명을 받는다. 모세의 이러한 헌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서 오는 순종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알게 되면 먼저 그분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모세는 말씀에 순종하여 기쁨으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일꾼으로 자처하여 그들을 인도하여 내었다.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을 숨긴 기생 라합은 사랑으로 행한 믿음의 행위였다.
다윗은 고난과 환난과 삶의 아픈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배신이 없는 유일한 자중의 하나였고 하나님은 그런 그를 사랑하셨다.
바울은 다멕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아니하고 복음을 위해 애쓴 것을 그의 서신서을 통하여 잘 알고 있다. 그는 죽음을 불사하고도 복음을 세계 곳곳에 전하기 위해 수고한 자 중의 하나였다. 주님을 향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베드로의 세번 부인은 그의 칼날 같은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친히 찾아오신 주님은 세 번 그에게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는 고백한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가 비록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주님을 부인하였지만 그는 주님을 사랑한 자이다. 그도 주님도 아신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말한다. 근심과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아심을 알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 이렇게 하심으로 주님은 그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허물이 많은 인간들이다. 주님은 완벽 하거나 완전한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점이 많으나 오직 말씀에 순종하고 주의 뜻을 행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즉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고 사랑을 위해 모든 일들을 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해 아무것도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뜨겁게 사랑할수 있으나 오늘의 마음이 내일의 마음이 될 수 없다. 항상 자신을 주의 말씀으로 지키지 않는 한 우리는 쉽게 넘어져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떠하든 지금 우리는 고백할 수 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