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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憂愁) 말라

by YEOLBI 202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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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你們心里不要憂愁, 你們信神, 也當信我.)

 

'마음(心)' 행동과 감정, 신앙의 중심이 되며 종종 '혼', '영' 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믿으라(信)'은 '피스튜오'의 현재형으로 현재 지니고 있는 그 믿음에서 조금도 이탈하지 말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근심(憂愁)'은 동요하다, 근심하다. 마음속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매우 혼란하고 번잡스런 상태.

근심은 우울하다. 걱정스럽다.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주님께 내려놓은 짐들을 다시 주섬주섬 쌓는 자신을 볼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눈에 보이는 결과에 만족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풀어놓은 보따리가 원하는 방법이나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는 다시 그 고민에 빠지고 또 풀어보고 다시 잠그고 하다가 다시 주님 앞에 풀어놓다가 다시 싸매어 가지고 가는 우리의 모습 속에 비애가 느껴진다. 왜 말씀대로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지 못하는 자신의 믿음에 회의감을 느낀다. 그리고 왜 여전히 이 정도의 신앙인가 여기서 더 한번 크게 아픔과 시린 가슴을 부여 앉는다. 

성경은 이러한 근심은 마귀가 주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를 병들게 하고 평안에서 벗어나는 낙심이나, 좌절, 절망은 우리를 살을 갉아먹게 하고 우리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질병에 걸리게 함으로 회복하기 힘든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이러한 영적인 질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을 믿으라고 권고하고 계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주님이 하신 근심은(憂愁) 무엇인가?

 

1.  요 11: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悲嘆) 불쌍히 여기사(憂愁)

'비통히 여기시고(悲嘆)'는 깊은 슬픔에 잠겨 눈물 흘리며 흐느껴 우는 것.

'불쌍히 여기사(憂愁)'는 '마음이 동요하다', '고통스럽다'는 뜻. 무리들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 마음이 매우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태를 의미한다.

주님께서 근심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주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시므로 인성이실 때에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지신 분이시다.

요 11장은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 주님을 기다린 자들은 주님이 늦게 온 것에 대해 원망하고 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있다. 마리아는 주님의 부재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주님은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심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주님이 분노하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계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슬픔과 아픔과 고통은 죽음이다. 사랑하는 자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고아, 과부, 홀아비가 발생하게 되고 그가 가진 빈자리가 가정의 고통이 되고 쓰라린 아픔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가지는 공감대이다. 주님이 오신 목적이 여기에 있다. 사망 권세을 이기시기 위해 오셨고, 그것에 대해 주님은 마리아를 만나기 전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 모두는 죽음이 두렵다. 그러나 주님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통분히 여기셨던 주님은 죽음에 처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메시야이시다.

 

2.  요 12:27"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憂愁)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괴로우니(憂愁)' '당황하다', '동요를 일으키다', '혼란을 일으키다'등의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마음이 매우 괴로우셨음을 시사한다.

주님이 완전한 인성이실 때의 모습이다. 주님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 간구한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계시고 그 일을 위해 오신 것도 아신다. 그리고 인간이 쓸 수 있는 '마음이 괴로우니(憂愁) 무슨 말 하리요'의 말속에는 주님의 깊은 고민과 당혹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때를 위해서 왔나이다'를 보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이며, 주님이 오신 분명한 사명을 느낄 수 있다.

24절에 그 사명이 분명 해지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고통의 십자가가 우리의 생명을 살렸고,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크나큰 역사 앞에 우리도 주님께 사랑을 올려드리고 싶다.

 

3.  요 13:2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憂愁)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

13장은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다. 그 후에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에 주님은 너무나 괴롭다는 표현을 하신다. 주님을 팔 자는 가룟 유다이다. 주님과 3년간의 공생애 동안 가룟유다도 함께였다. 그는 회계를 맡았다.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바랐던 예수는 지금의 예수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고 자신이 바라는 민족의 지도자를 원했다. 그러나 주님은 인류를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같이 있으나 바라보는 것들이 달랐던 가룟 유다는 주님을 팔 생각을 한다. 이를 안 주님은 괴로워하신다. 

주님은 가룟유다의 배신 앞에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앞으로 있을 자신의 죽음 앞에서 괴로워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진 고통과 아픔과 환난과 괴로움을 아신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 모든 일을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고 믿음 안에 서야 한다. 그 믿음만이 주님이 이기시고 승리하신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주님의 말씀은?  

 

1.  요  16:20-2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憂愁) 너희 근심이(憂愁)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憂愁)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憂愁)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곡하고'는 눈물 흘리며 큰 소리로 울부짖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제자들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상징한다.

'보리니'는 '소마이'는 '보다'의 미래 중간태로서 예수께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주님을 믿든 믿지 않든 생로병사를 모두 겪는다. 믿음의 사람들이 다른 점은 이 모든 것을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주의 도우심으로 모든 일들을 잘 넘긴다는 것이다. 거기다 우리에게 큰 소망을 주셨다. 주님은 부활하셨고, 주님의 다시 오실 때 재림하실 때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이기쁨에서 우리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빼앗을 것이 없다. 

오늘도 우리는 삶의 무게 때문에 힘들고 좌절하며 아파하지만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허락하신 주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고 계시다. 우리가 우리의 죄의 무게 때문에 보지 못하고 있을 뿐 주님은 우리를 떠나시거나 우리 곁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아니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자신의 문제에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자 거기에는 선하시고 인자하신 주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도와주소서' 믿음으로 구하는 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해 , 이스라엘이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에 모세로 하여금 놋뱀을 만들어 바라보는 모든 자을 살리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주님을 바라보라고 그것이 생명을 얻는 길임을 오늘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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